외로움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지금까지 인류가 무사히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세 가지 뗏목 덕분으로 생각된다. 가족애와 우정, 그리고 절대자나 자연에의 귀의가 그것이다. 현대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허물어져 버린 시대다.

By CARROT 11 min read
외로움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

많은 사람들이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 가정이 파탄 난 가족들, 직장에서 왕따당한 사람들, 마음에 맞는 짝이나 친구를 찾지 못해 애태우는 젊은이들, 모두가 외로운 존재들이다.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는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젊은 시절 우리 모두 삶의 길을 찾느라고 얼마나 방황했던가. 또한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의 고통을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또 얼마나 외로워했던가? 이제 고독과 외로움은 젊은 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 비슷하게 되었다.

고독은 홀로 있음이며, 외로움은 상황에 의해 강요된 고독이다. 둘다 <홀로 있음>의 상태지만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종교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고독과 외로움을 극명하게 구별해준다. “우리의 언어에서 현명하게도 홀로 있음의 두 측면을 나타내는 각기 다른 단어가 존재한다. 홀로 있음의 고통에 대해서는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홀로 있음의 영광에 대해서는 ‘고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누구나 일생에 적어도 한두 번은 외로움의 강을 건너야 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때로는 위험한 강이기도 하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1660~1731)가 1719년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항해 중 배가 난파하여 무인도에 포착하여 혼자 살다가 28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근대적 개인주의의 실험으로 해석되는 이 소설에는 인간이 사회와 떨어져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2000년 개봉한 <캐스트 어웨이> 영화에서도 외로움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상태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스템 분석가인 주인공 척 놀랜드는 업무상 여행 중에 비행기 사고로 태평양의 무인도에 표착한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윌슨 회사가 제작한 배구공에다 피로 얼굴을 그린 후 ‘윌슨’(Wilson)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와 끊임없이 대화를 지속한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배구공을 친구로 간주하고 대화 형태로 독백을 이어가는 상황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외로움이란 소속감과 연결감이 끊어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느낌이다. 이것은 단순히 나 홀로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다.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심정이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도움을 받고자 간절히 원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의 단절의 고통이다. 이런 점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원한다면 언제든 탈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혼자 있기를 선호한다. 자아를 충전시키기 위해서, 혹은 일상의 자아를 넘어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기도 한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에서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사의 복잡한 갈등을 감안하면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찍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고아들, 믿었던 사랑과 우정에 배신당한 사람들,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사람들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거대한 사회적 문제로 발전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결국 근대 개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동양의 일곱 가지 감정 중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없다. 굳이 따진다면 두려움(懼)이 외로움과 가장 연관되는 감정일 듯하다. 서양에서도 외로움을 의미하는 단어 lonely 는 17세기 4대 비극 작가로 유명한 셰익스피어가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사회는 개인주의의 사회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율과 주체성을 우선시 한다.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이런 개인주의가 극단화될 때 개인들은 모래알같이 된다. 오늘날은 핵 개인주의 시대다. 가족마저 거의 해체되어 모두가 원자화된 시대다. 홀로 사는 시대다. 자유를 지나치게 추구한 대가로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다.


왜 우리는 외로움을 질병으로 볼 수밖에 없는가? 외로움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우선 외로움은 개인의 면역력을 크게 떨어뜨린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우울증의 원인이 외로움 때문이라는 보고도 있다. 그리고 우울증이 자살의 가장큰 원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소속감이 결여된 외로운 상태에서 인간은 반사회적인 사이코패스가 되기 쉽다. 최근에는 ‘외로운 늑대’라는 범죄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하기도 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는 불안해진다. 외로운 늑대는 사회적 외톨이의 외로움이 울분으로 폭발한 비극이다.

더 나아가 한나 아렌트는 정치 철학적인 시각에서 외로움이 전체주의의 온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외톨이는 자신을 전혀 쓸모없는 존재로 혐오하면서 사회에 대한 울분을쏟아낸다. 이것은 전체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최근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포퓰리즘이나 팬덤 정치도 외로움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사회의 변화로 볼 때 개인의 고립과 사회적 단절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가족의 해체, 1인 가구의 증가, 과도한 경쟁, 자연과의 단절 등이 모두 외로움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어떻게 외로움의 강을 건널 것인가?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많은 현자들은 외로움을 먼저 고독으로 바꾸고, 고독을 다시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말하자면 두 단계 전략이다. 1) 외로움을 고독으로 전환하는 단계 2) 고독의 조절 단계가 그것이다. 이때 두 번째 단계보다 첫 번째 단계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고독의 조절은 자력으로 가능하지만, 외로움에서 탈출하는 것은 혼자 힘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무언가의 일에 몰입함으로써 외로움을 고독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로운 상태에서 어떻게 몰입이 가능하겠는가?

지금까지 인류가 무사히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세 가지 뗏목 덕분으로 생각된다. 가족애와 우정, 그리고 절대자나 자연에의 귀의가 그것이다. 현대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허물어져 버린 시대다. 가족의 해체와 함께 가족애를 논의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지나친 경쟁 때문에 우정도 유지하기 어렵다. 또한, 현대는 탈종교의 시대다.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의 연결도 끊어진 상태다.

에드가 드가, <우울> 1874

어떻게 할 것인가? 손상된 옛 뗏목을 다시 복원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운명공동체인 가족이 붕괴된 이상 외로움을 완전히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옛날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전통적인 가족을 부분적으로나마 대신할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정부 조직 속에 외로움부를 만들어 외로움이나 고독사의 문제를 전담하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외면적인 도움만으로 외로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못할 것이다.외로움에 빠져 있는 당사자 자신의 노력과 의식의 상승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정의 복권을 검토할 수 있다.

우정을 나눌 친구가 많다는 사실과 연결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요즘 사람들은 사회 연결망(SNS)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나 문자로 또는 이메일로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한다. 연결망은 더욱 넓게 퍼지지만, 깊이는 점차 얕아지는 인간관계는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우정의 복권은 연결망은 좁히더라도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 진리나 자연과의 끊어진 연결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복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