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 문호 톨스토이는 평생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한 사유를 통해 기라성 같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모든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고 노년에는 시골 간이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러시아제국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작인들에게 경작지를 나눠주고, 그들을 공부시켰으며, 자신도 소작인들과 똑같이 일을 하였다. 그에게 농장은 소유의 표식이 아닌 삶 그 자체이고,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는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이타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실천한 한 인간의 위대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당연히 ‘누구’ 이전에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 사유의 담금질 속에서 찾아낸 ‘의미’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삶의 궤적을 형성해 나간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전향(conversion)’을 경험하며‘알’ 밖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이는 기존 세계의 시스템과 결별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나아감이다. 이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환희이고, 불가역적일 수밖에 없다.
2월 17일. 내가 개인적으로 기리는 날이다. 400여 년 전, 지구는 태양계의 일부이며, 태양계는 더 큰 우주 시스템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신성이 자연성에 기인한다고 설파한 죄로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의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진 날이다. 당시 그의 주장은 1500년간 세상을 지배해 왔던 질서를 단박에 부정하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절대 신의 영역인 창조와 질서에 반하여 우리의 의식세계를 넓히고,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자연을 넘어 훨씬 거대한 우주의 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한 씨앗이 되었다. 신학자였던 그가 불속에 자신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진실은 지금은 초등학생도 아는 그런 상식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 ‘전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전제는 자기인식이다. 이것은 관성적인 자신을 ‘의심’하면서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붙들고, 해묵은 껍질을 벗겨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순수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각성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확고한 의무가 된다.
이제 봄이다. 만물이 각성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린다. 그 안에 진짜 내가 있다.
그저 열심히 살 것인가? 아니면 각성된 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두리번거릴 이유가 없다.
C.E.O James Roh (노상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