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여러 마리의 소를 기르며 치즈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사람들은 그 치즈 맛을 신기해하면서 웃돈을 주고서도 치즈를 사갔다. 한 도둑이 이런 부자의 소를 탐내어 훔쳤다. 하지만 그는 소에서 치즈를 얻을 수는 없었다. 우유는 그냥 놓아둔다고 치즈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고 버터의 과정을 거쳐 치즈가 되기까지는 각 단계에 맞는 온도와 습도는 물론이고, 박테리아와 시간이라는 조건이 어우러져야만 한다. 이로써 치즈는 우유보다 7배의 단백질과 5배의 칼슘을 품은 소중한 영양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삶의 단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선한 우유라는 좋은 재료가 있더라도 이것이 요구르트라는 변화의 과정이 없이 최상급의 치즈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최적의 조건 속에서 원재료 안에 내재된 힘이 온전히 발현되는 과정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양질의 치즈도 우유라는 본질적 속성을 벗어나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신성에 가까운 온전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각자의 환경 안에서 어떤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삶의 양태는 제각각 다르다.
그렇다면 훌륭한 삶의 치즈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있을까? 그것은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사유와 숙고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찰’에 있다. 이것은 실존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속적인 힘이다. 이런 자는 늘 깨어있고, 항상 열려있으며,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이들에게 어제는 분명한 오늘이었고, 내일은 분명한 오늘일 뿐이다. 삶은 가능태_potentiality의 장 위에 있다. 성숙을 지향하는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최고의 현실태_actuality로 창조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제의 나, 그 업_karma을 벗어나는 것이 참 힘들다. 대오각성이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것은 누구에게는 세수하다 코 만지듯이 쉬운 일이지만, 지혜가 없는 자에겐 그 역사가 평생 일어날 수 없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자각하는 순간만이 온전히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제 정신없이 달려온 한 해를 마감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때때로 남의 소에서 치즈를 얻으려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내곤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소에서도 치즈를 짜낼 수는 없다. 진정한 삶의 치즈는 온전히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만 발효되고 숙성될 수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적의 발효 조건을 찾아내고, 나머지는 우유 자체의 속성에 맡길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다시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올 한 해 얼마큼 더 발효되고, 성숙되었는가? 스스로 묻지 않으면 결코 내일의 치즈는 얻을 수 없다.
C.E.O James Roh (노상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