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실은 인류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질병은 분노한 신이 인간에게 주는 ‘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신께 용서를 구하고, 신을 위로하며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질병은 ‘신성화된 무엇’이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마법사나 주술사들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병자가 죽으면 신의 뜻이라고 하였고, 병 상태가 호전되면 영험한 주술의 힘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질병을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한 사람은 바로 히포크라테스였다.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 우리는 미개한 주술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불확실성이 압도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쩌면 주술에라도 기대 보고 싶은 심정을 자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빠르고 광폭적인 변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일상에서 선택하고 나아가야 하는 리더들에게는 특히 불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의 힘과 지혜다. 무지는 미지의 초월적인 힘에 의탁하려 하지만 이성은 스스로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개척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를 떨치고 지혜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혜의 전통은 몸과 마음을 닦을 것을 요구한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문제인데, 몸을 잘 관리하지 않고 함부로 굴리면 상하는 것처럼 마음도 잘 가꾸지 않으면 삶을 고통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세계의 변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통찰해 내는 근원적인 마음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의지하는 것을 지혜라 할 수 있으며, 3가지 수준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문혜_聞慧’다. 우리가 흔히 글을 통해서 배우는 명시적인 지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명시적 지식은 효과적으로 이성의 수준을 올릴 수 있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류가 근대사에서 문명의 수준을 빠르게 향상시킨 데에는 보편적 교육에 의해 이성의 힘을 기른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두 번째 수준은 ‘사혜_思慧’다. 깊은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다. 몸의 근력처럼 단련된 사유의 힘은 명시적 지식이 주지 못한 통찰을 얻게 해준다. 이런 통찰 지혜는 삶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필수적이며,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내면의 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 끝으로 ‘수혜_修慧’다. 이 수준은 두 번째 수준을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하며, 지혜가 일상과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신성은 일상에서 드러난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개인의 인격과 참 모습은 일상에서 면면히 실천되고 동시에 형성된다. 이때 앎과 삶은 자연스럽게 통합되고 하나가 된다.
리더십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일상에서 자신의 면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혼돈 속에서도 고요를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이는 마법의 영역이 아닌 깊은 사유를 통한 통찰과 지혜로운 리더의 삶의 양식에서 비롯된다.
C.E.O James Roh (노상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