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자적 인간 vs. 대자적 인간: 마음의 공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대자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두운 숲에 빛이 들어옴으로써 공간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상에서 자신을 안으로 비추어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By CARROT 4 min read
즉자적 인간 vs. 대자적 인간: 마음의 공간

소나무 사진작가로 알려진 배병우 님은 40년간 산속에 들어가 소나무를 찍었다. 2005년 영국 팝가수 엘튼 존이 그의 소나무 작품을 구입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소나무들이 대부분 이른 새벽에 촬영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왜 작가는 어두운 산속에 들어가서 외로움에 떨며 그 시간을 기다린 것일까? 바로 숲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 공간이 열리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새로운 형상들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숲의 주인공은 ‘관찰자’다. 변화하는 형상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초 집중적으로 렌즈를 통해서 관찰하고 있는 시선이다. 만약 작가가 그 관찰자의 시선을 잃어버린다면 그 숲은 여느 숲과 다르지 않으며, 고요한 적막은 그저 적막일 뿐이다.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런 자연현상으로부터 괴리를 만드는 것이며 거리를 유지하는 의도적 행위인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대자적(對自的) 이라고 한다. 현상에 대해서 일정도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대립하면서도 침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성숙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마음의 공간을 유지할 때  형성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즉자적(卽自的) 인간의 태도는 현상에 즉각 반응하고 여과 없이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건강한 대립이 양립할 수 없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100년을 산다 해도 성숙은 1센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대자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두운 숲에 빛이 들어옴으로써 공간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상에서 자신을 안으로 비추어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그 순간 현상과 타인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의 공간이 확보될 수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작가가 빛이 들어오기 전에 어두운 산속을 올랐듯이,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안의 어두운 동굴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숙으로 가는 여정은 늘 그러하듯이, 자신의 미성숙을 인식한 그 순간 ‘시작’이다.        

 

이미, 봄(spring)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절로 뛴다. 새 생명의 기운은 먼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우리 발밑에서 움트며 솟아나는 것임을 온몸으로, 마음으로 느껴보는 그런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C.E.O James Roh (노상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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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그대 자신과 하나일 때 그대는 선하다.『칼릴 지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