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적 만년설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은 전 세계 8,000m 이상 높이의 산 14좌중에 12좌를 품고 있어 가히 지구의 지붕이라 일컬어질 만 했다. 혹자는 만년설산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업장이 씻겨 내려간다고 했던가!
나는 12일의 일정으로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해두었던 히말라야 안나푸루나를 향해 네팔로 떠났다. 카투만두와 포카라를 거쳐 힐레(1,430m)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산악 가이드는 걸음마 하듯 아주 느리게 산행 속도를 제한했는데, 왜 이렇게 천천히 걸어야만 하는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트래킹의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320m)에 도달하기 훨씬 전부터, 몸은 고도에 적응 못하고 고소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의 밤은 길고도 길었다. 뒷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두통과 구토증세로 나는 긴 밤을 꼬박 새야만 했다.
네팔의 고산지대에는 수 많은 구릉족들이 산다. 산 허리를 감아 돌 때마다 하늘을 닮은 파란색 페인트로 입혀진 마을과 그들의 삶이 있었다. 나는 산행을 하는 동안 내내 행복의 나라 네팔에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화두를 들었다.
행복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심리학에서 ‘주관적 안녕감’으로 정의하는걸 보면 다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매일같이 행복을 외쳐대며 목말라 하는 것일까?
행복은 굳이 찾아서 주머니 속에 넣어야만 하는 것인가? 문제는 바로 주관적 느낌이란 ‘마음’의 함정에 있다. 마음은 바람에 흐트러지는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기에 그 마음의 주체인 ‘나’마저도 그 형태를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행 중에 깃드는 좋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신의 은총을 느낄 수 있지만, 짙은 안개와 진 진눈깨비 속을 걷다보면 어느새 어두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밀고 들어온다. 이렇게 날씨 하나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에 붙어있는 행복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헤르만 헤쎄가 이야기 하는 인간의 종국적이며 유일한 목적으로서의 ‘행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마지막 날 티벳불교의 전통이 서려있는 보드나트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이 질문에 대한 고삐를 쥐었다. 그것은 한 눈에 들어온 부처의 ‘깨달음의 눈(the eye of wisdom)’안에 있었다. 우리가 찾는 행복은 변화무쌍한 마음이나, 그때 그때 느끼는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내면의 깊은 고요’속에 있는 것이었다.
행복은 태고의 설산아래 감추어져 있는 무엇이 아니며, 누구에게는 우연히 주어지는 한 줌의 행운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히말라야 산 기슭 촌부들의 순박한 모습이 우리가 찾는 그런 행복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히말라야 순례에서 만난 이방인들의 진진한 눈빛에서, 자신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다양한 여정의 끝에서 행복은 스스로의 열매를 맺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나’를 섬세하게 탐색하고, 세상에 대한 이치를 사유함으로서 우리는 더 깊은 행복과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바로.여기 내 안에서!
C.E.O James Roh (노상충)